변호인이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을 ‘방어’(변호)하기 위해서는 공소를 제기한 검사가 피고인을 ‘공격’(처벌해달라고 주장)하는 근거인 수사 기록을 확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래 링크 참고).
변호인은 형사 사건의 검사 수사 기록을 어떻게 얻을까요?
객관식 문제처럼 보기를 들겠습니다.
- 검사가 변호인에게 (종이) 수사 기록의 복사본을 준다.
- 검사가 수사 기록 파일(컴퓨터 파일)을 변호인에게 이메일 등으로 보내 준다.
- 변호인이 검사의 (종이) 수사 기록을 직접 복사한 후 그 복사본을 가져 간다.
- 법원이 검사가 제출한 (종이) 수사 기록을 복사하여 그 복사본을 변호인에게 준다.
정답은 3번입니다.
사전에 열람 및 복사 신청하여 예약된 일시에 검찰을 방문한 변호인은 수사 기록 원본을 복사한 후 복사본을 가져오게 됩니다.
‘변호인이 수사 기록 원본을 복사한다’라는 지극히 평범한 이 한 문장에 IT의 무덤이 존재합니다.
도대체 어떻길래 종이를 복사하는 간단한 과정에 IT의 무덤이 있을까요?
일단, 수사 기록의 양이 상당히 많습니다.
기록의 양이 수백 장에서 수천 장에 이릅니다.
참고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 공판과 관련된 검사의 수사 기록이 12만 장 정도 된다고 합니다.
기록의 양이 많더라도 복사기의 ADF(Automatic Document Feeder)를 이용하여 자동 복사를 할 수 있다면 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형사소송에 대해 ‘IT의 무덤’이라는 말을 쓰지도 않았겠지요.
‘IT의 무덤’이라는 어구에 걸맞게 자동 복사, 당연히 안됩니다.
자동 복사가 되지 않는 이유는 수사 기록의 물리적 구조 및 검찰의 통제(?) 때문입니다.
수사 기록은 아래와 같이 생겼습니다.
문서 위에 까만 줄 같은 것이 ‘철끈’입니다. 서류 뭉치에 구멍을 뚫어서 철끈으로 묶은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원고지 등을 철끈으로 묶어서 사용해 보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제가 알기로 서류를 철끈으로 묶어서 관리하는 것은 70 – 80년대에 많이 쓰였던 방법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식(old-fashioned) 서류 관리법이 현재 대한민국 검찰에서도 여전히 쓰이고 있는 것이죠.
위 그림과 같은 서류를 ‘철끈’을 완전히 분리하지 않은 채로 두꺼운 수사기록 뭉치(위 그림의 빨간색 부분)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겨가면서 일일이 복사해야 합니다. 검찰이 수사 기록을 복사할 때 ‘철끈’을 분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 ‘백투더퓨처’에서 그려졌던 30년 후의 미래였던 2015년 10월 21일이 2년 이상 훌쩍 지났을 뿐더러 만화 ‘2020원더키디’의 2020년이 2년 앞으로 다가온 2018년 7월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철끈’을 완전히 분리하지 못한 채로 수백 장이 넘는 종이 서류를 (길게는) 2~3일 동안 꼬박 복사해야 검사의 수사 기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수사 기록을 직접 복사해 본 경험이 있었는데, 몇 시간 동안 두꺼운 수사 기록을 한 장씩 넘기며 복사하고 있으니 ‘도대체 내가 여기서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끊이지 않더군요. 형사소송에서 피고인을 변호할 때 변호사인 제게 가장 어려운 일은 단연코 수사 기록의 복사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검찰 혁신’이 정부의 주요 이슈 중의 하나인데, 검찰의 위로부터의 개혁도 중요하지만 ‘검사 수사 기록 복사’와 같은 사소하지만 국민에게는 중요한 이러한 아래에서부터의 혁신 역시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일반 국민들이 이러한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정부에게 개선을 요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말도 안되는 수사 기록 복사 방식으로 인한 피해는 결국 국민들에게 전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변호인 선임 비용의 상승 등). 저는 이러한 엄청난 구시대적이고 국민(또는 변호인) unfriendly한 방식의 수사 기록 복사 방법을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다시 수사 기록 복사 얘기로 돌아와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오랜 시간(몇 시간 내지 며칠)동안 복사하는 것으로 일이 끝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 끝난다면 ‘IT의 무덤’이 아닙니다.
복사 후의 일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 쓰겠습니다.